Friday, May 23, 2008

BANANA REPUBLIC


"비즈니스 프렌들리? 바나나 꼴 된다"
<인디펜던트>"바나나의 역사는 이 시대의 우화"

2008-05-23 오후 4:09:15


전세계적으로 식료품 값이 치솟고 먹거리에 대한 공포가 커져가고 있는 가운데, 쌀과 감자보다도 많은 양이 소비되고 있는 작물이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바로 바나나다. 특히 바나나는 '식품 제국주의'의 마수가 특정 작물에 뻗칠 경우 그 작물이 멸종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현실로 보여준 비극적 역사를 갖고 있다.

미국 등 제국주의의 '플랜테이션' 작물로 전세계로 보급됐던 특정 바나나 품종이 한 차례 대량생산 라인에서 사라진 전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차선책으로 선택된 또다른 품종이 지금 몇 년 내에 다시 같은 운명을 맞게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적을 것이다.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22일 지금 우리가 즐겨먹는 바나나 품종인 카벤디시(Cavendish)가 죽어가고 있는 내막과 제국주의에 의해 유린되고 있는 '바나나 공화국'의 현실을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원문보기)

필자는 저명한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나핸 해리다. 기사에 따르면, '파나마 병'으로 불리는 곰팡이에 감염된 바나나는 벽돌처럼 굳어지며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바나나에게는 '암'이라고 불리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치료법은 없다. 한 번 발생하면 급속도로 확산되며 막을 길도 없다. 전문가들에 따라서는 5년, 10년 길면 30년 후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나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 '바나나 공화국'의 하나인 니카라과에서 1970년대 '네마곤'이라는 바나나 농약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바나나 공화국'의 피가 묻은 바나나

해리는 "바나나의 흥망성쇠 과정은 세계를 점점 지배하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괴담이며, 기업들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보여주는 우화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나나는 원래부터 흔한 천연식품이 아니다. 유나이트 프루트(United Fruit. 현재는 치키타)라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사람들의 입맛에 가장 맞는 그로스 미셸(Gros Michel)이라는 특정 품종을 선택해 대규모 농장에서 재배하기로 결정하면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대량생산 과정이 제3세계에 대한 착취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그 과정은 이렇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를 찾아서 괴뢰 독재 정권을 세우고 자기들의 유리한 조건들을 강요했다. 물론 만일 이에 저항하는 정권이 있다면 교체한다.

'바나나 공화국'으로 불리는 괴뢰 독재 정권의 비호 아래 열대 우림을 불태우고 바나나 플랜테이션을 건설한다. 대표적인 '바나나 공화국'은 중남의 온두라스,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이다.

1950년 대 초 과테말라 국민들은 바나나 대기업들이 소유한 땅 일부를 무토지 농민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한 과학교사 출신의 야코보 아르벤스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CIA(당시 국장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출신)는 이 '공산주의자'들을 암살 대상으로 지목하고 살해 수단까지 적시했다. 망치, 도끼, 렌치, 드라이버, 부억칼 등이었다. 정권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20만 명 이상이 살해됐다.

최근에는 치키타와 함께 바나나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돌(Dole, 전신은 스탠더드 프루트)'이 1970년대 바나나 농장에서 사용하던 '네마곤(DBCP)'이란 살충제 농약 때문에 니카라과 플랜테이션에 일했던 노동자들이 불임과 암에 시달리고 있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진행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익 추구에 혈안이 된 다국적 기업들의 대응

'무소불위'의 대기업들이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말 안듣는 정권은 교체할 수 있어도 바나나에게 발생한 괴상한 질병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나이티 프루트 소속 과학자들조차 20세기 초 '파나마 병'이 발생하기 전부터 특정 품종만 접목 기술로 번식시키는 바나나의 대량생산 방식이 초래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자기복제 식으로 계속 바나나가 무성 생식으로 생산을 거듭하면 특정 병이 발생할 경우 속수무책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방역을 철저히 하면 사태 악화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에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주주들의 단기 이익 창출에만 봉사하도록 된 기업으로서는 당장의 이익을 누리다가 현재의 바나나 품종이 멸종되면 또 다른 품종을 찾으면 된다는 식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유나이티드 프루트가 '유일한 진짜 바나나'라는 이름으로 팔아대던 '그로스 미셸' 품종의 바나나는 1960년대에 들어 대량생산 라인에서 사라졌다. 이에 대체 품종으로 등장한 것이 '카벤디시'다. 그로스 미셸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파나마 병'에 내성을 가진 것으로 먹을 만한 것은 이것 뿐이었다.

유전자 조작 바나나라도 먹어야 할까?

하지만 해리는 "공포영화 속편처럼, 살인마는 다시 찾아왔다"고 말한다. 1980년대 들어 카벤디시 역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카벤디시를 쓰러뜨릴 변종 곰팡이가 등장한 것이다.

제 3의 품종은 있을까? 물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나나와는 아주 다르고 맛도 훨씬 떨어져 대량생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품종들 뿐이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후보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과학자들이 수백 종의 바나나를 교배해서 개발한 '골드핑거' 품종이다. 이른바 사과처럼 시큼한 맛이 나는 바나나다.

이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파나마병에 내성이 있는 유전자 조작 바나나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대량생산 및 보급되기까지는 현실화되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반대도 만만치 않다.

해리는 "바나나와 피와 곰팡이의 기묘한 밀크셰이크 속에 이 시대의 우화가 담겨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는 수백년 동안 몇몇 기업들이 규제도 받지 않고 특정 작물로 최대한의 이윤을 쥐어 짜낸 결과 수많은 나라의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드넓은 열대우림이 불태워지고, 작물 자체마저 죽여버리는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해리는 "조지 W. 부시 같은 전세계의 정치인들은 기업에 대한 규제는 '철폐되어야 할 위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심지어 지구의 기후도 그들 손에 맡기라고 한다는데 그러다가 바나나 꼴 된다"고 경고했다.



이승선/기자